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해주 4월 참변 (문단 편집) == 습격과 4월 연해주 참변 == 1920년 3월 일본 제국 사령부는 연해주의 혁명 수비대에게 전면 공세할 준비를 했고 이것을 군인들에게 비밀리에 명령했다. 항일 조선인 제거 계획도 이때 포함됐다. 시노다 지사쿠의 후임자이며 조선 총독부 관리인인 야먀자키 마사오가 이 계획을 세우는 데 앞장섰다.[*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31쪽] 그래 놓고 3월 31일엔 시베리아 [[일본군]]을 철병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군]]은 이미 철병을 선언한 상태였다. 1920년 1월 20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미군을 철병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같은 해 4월 1일 러시아 주둔 미군 사령관 윌리엄 그레이브스(William Graves) 사령과 병사 2,300여명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일제 군사령관은 4월 2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정부에게 경고했다. 한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연해주 정부에게는 "일본군의 주둔에 필요한 제반의 사항 즉, 숙영·급양·운수·통신 등에 관하여 지장을 주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연해주 정부는 일본군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4월 5일 조약문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붉은 군대는 각 부대에 경계 태세를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4월 4일 지휘관들의 다수가 주말 휴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날인 4월 4일 밤 일본군은 붉은 군대를 습격하고 군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체포했다. 일본군의 습격은 4월 8일까지 계속됐다.[* 반병률 潘炳律,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 2009년, 45 ~ 46] [[한창걸]]은 이때를 이렇게 증언했다. >「1920년 4월 2일 나는 12시간 내에 한인 부대를 무장 해제시키라는 연대 정치 전권 위원 레베데프 동무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로 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이것은 외교적 고려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는 아직 아무에게도 발사하지 않은 장총을 가지고 살아 있고,만일 그들이 나와 일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떠나겠다"고 제안했다. 레베데프 동무는 나에게 "이것은 단지 완전한 사업을 위한 위장일 뿐이며, 대대는 일본인이 보는 곳에서 무장 해제를 하고, 다른 날 무장 해제당한 빨치산을 무장시키기 위해 500정의 장총이 수찬으로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야 나는 동의하고 레베데프 동무에게서 ‘한창걸의 명령으로 수찬으로 장총 500정을 선적한다’는 명령 서류를 가져왔으며, 몇몇 동무와 상의하여 일본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무장 해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대로 갔다. 이와 동시에 은밀히 무장 병력을 타이가로 보냈다. 남은 이들은 무장 해제했다. > >4월 4일 저녁 10시 무장 해제한 빨치산들을 수찬으로 데려다 줄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러시아 빨치산의 정찰병이 도착하여 "일본군이 다가오고 있으니 즉시 숨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로마노프까로 향해 갔다. 로마노프까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격과 포격이 우리를 향해 시작되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예전 빨치산들이 도망쳐 와서 "일본군이 수비대를 포위하여 많은 이들을 죽이고 생포했다"고 알려왔다. 그때 우리는, 한인 빨치산 부대의 무장 해제는 러시아군의 무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 통수부의 책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수찬군 니꼴라예프까 마을에서 우리는 쉬꼬또보에서 타이가로 떠났던 우리의 무장 부대를 만났다. 여기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사람은 많고 장총은 적었다. 우리는 가장 전투적인 동무들을 선발하여 그들로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조만간 다시 소집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해산하여 집으로 갔다. 조직된 부대는 다시 니꼴라예프까 마을에 주둔했으며 전투는 하지 않았다」[* Хан Чан Гер,Там же(한창걸, 극동 내전에 한인 노동자들의 참여에 대한 회상 ),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125쪽 ~ 126쪽에서 재인용] 일본군의 습격으로 기존 항일 세력은 파괴되고 무너졌다. 일본군은 연해주를 장악하고 투옥된 백군 세력을 석방하고 무장 해제된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체포했다. 군인 중 러시아인은 백군 진영에게 넘겼다. 4월 9일, 라조, 루츠키, 시비르체프, 안드레예프 같은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5월 말 일본군은 라조 일행을 백군 부대에 보냈다. 백군들은 이 일행들을 무라비요프 - 아무르스카역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일행을 살아있는 채로 기관차 화실에 던져 불태워 죽였다.[* 반병률 潘炳律,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 2009년, 4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